윤동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간 청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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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1917. 12. 30. ~ 1945. 2. 16.
출생지 만주 간도 명동촌

하늘, 바람, 별

시를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시대의 어둠 속에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 거는 일이다. 일본식 이름 사용과 국어사용 금지, 강제 공출과 징병제 등으로 식민지 피지배의 ‘어둠’이 깊어갈 무렵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1) 시인이 있었다. 나아갈 길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 속에서 언젠가 홀연히 닥칠 ‘아침’을 기다리던 그가 바로 윤동주(, 1917~1945)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2)의 어둠 속에서 끝내 ‘아침’을 맞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

윤동주는 불같이 행동하는 실천적인 인간형이 아니라 고요히 자아를 응시하는 내면적인 인간형에 속한 사람이다. 밤하늘의 별을 헤며 패, 경, 옥과 같은 예전에 알던 이국 소녀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와 같은 순한 동물들, 그리고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같은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보던 다정다감한 젊은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는 사람들이 호구지책과 안락한 생활, 사유 재산에 집착할 때 고요한 내면에 병균처럼 파고든 시대의 어둠을 조용히 응시하며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씌어지는 것”3)조차 몹시 부끄러워한다.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이던 그는 해방을 불과 여섯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차디찬 이국의 감옥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의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 이름이 높던 김약연()의 누이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명동은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전형적인 농촌으로, 1899년 바로 윤동주의 외숙부인 김약연 등에 의해 개척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기독교와 교육,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던 곳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원 교사를 지낸다. 윤동주는 명동촌의 큰 기와집에서 자란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서른 그루쯤 되는 살구나무와 자두나무가 있는 과원, 동쪽 쪽대문 밖에는 깊은 우물이 있는 풍경을 그는 나중까지 잊지 않는다. 쪽대문 밖의 우물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보면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4)가 비치던 바로 그 우물이다.

그 사나이는 오뚝하고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투명한 살결, 단정한 매무시를 한 미남 청년의 모습이었으리라. 귀족적인 풍모에 깔끔하면서도 맵시 있는 멋쟁이였던 윤동주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소학교 시절에 문학과 만난다.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그는 나중에 일본 유학과 죽음까지 함께 하는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어린이·아이 생활 같은 소년 잡지를 구독하고 연극 활동을 하면서 문학적 소양을 닦는다. 5학년 때는 송몽규와 함께 월간 잡지 《새명동》을 직접 등사판으로 펴내기도 한다. 여기에 윤동주는 제가 쓴 동시와 동요 등을 싣는다.

당시 윤동주를 비롯한 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는데,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졸업 선물로 주었다는 데서도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촌에서 20여 리 떨어진 중국인 마을에 있는 소학교에 편입한다. 이곳의 학교에 1년쯤 다닌 추억은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함께 시 「별 헤는 밤」을 낳는다. 다음해인 1932년 윤동주는 고향 명동을 떠나 용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용정 은진중학교 시절에 윤동주는 폭넓은 활동을 한다. 교내 잡지를 발간하느라 밤새 원고지와 씨름하는가 하면 축구와 농구, 웅변에도 소질을 보인다.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 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틀로 하기도 하였다. 2학년 때이던가,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 한 일이 있어서 상으로 탄 예수 사진의 액자가 우리 집에 늘 걸려 있었다.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 윤일주, 「윤동주의 생애」,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당시 간도 지방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국으로 유학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도 부모를 설득해 1935년 9월에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한다. 전학한 해에 그는 숭실중학 YMCA 문예부에서 발간한 숭실활천에 시 「공상」을 발표하고 여러 시집을 탐독한다. 1936년 1월에는 1백 부 한정판으로 출판된 백석의 시집 『사슴』을 미처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실에서 하루 내내 시집 전체를 베껴 쓰기도 한다. 1936년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이 폐교를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온 그는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2년 동안 중학 과정을 더 밟는다.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것은 스물두 살 때인 1937년의 일이다.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숟가락」으로 당선된 바 있는 문인으로, 당시에는 꽤 알려진 이름이었다. 진학을 앞두고 윤동주는 문학공부를 하길 원하지만 아버지 윤영석이 의학을 전공하라고 해서 한동안 갈등을 겪는다. 졸업반인 5학년 2학기부터 다음해인 1938년 초까지 몇 달 동안 부자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한다. 윤동주가 식음마저 전폐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자 할아버지 윤하현과 외숙부 김약연이 나서 아버지를 설득, 마침내 윤동주의 문과반 진학이 이루어진다.

최현배의 조선어 시간을 비롯해 손진태의 역사 시간, 이양하의 영문학 강의 등을 들으며 윤동주는 연희전문 시절 민족의식과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게 된다. 강의가 없으면 주로 산책과 독서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서정주 등의 시를 열심히 읽고, 외국 문인으로는 도스토옙스키, 앙드레 지드, 발레리, 보들레르,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랑시스 잠, 장 콕토 등에 빠져든다. 책을 읽다가 답답해지면 황량한 서강 들판과 인적 없는 창내벌(지금의 창천동)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혼자 걸으며 시를 구상한다. 윤동주를 알던 이들은 그가 선천적으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연희전문 4학년 때 기숙사에서 나온 윤동주와 함께 소설가 김송의 누상동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한 연희전문 2년 후배 정병욱의 회고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그 무렵 우리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았어. 아침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어. 세수는 골짜기 아무데서나 하고.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조반을 마친 다음에는 학교로 나갔지. 하학 후에는 소공동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나가 충무로 일대의 책방들을 순례했어.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 군서당과 같은 신간 서점과 구서점들을 돌고 나서 음악다방에 들러 차를 마시며 새로 산 책들을 펴보곤 했지. 가끔은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기도 하고. 다시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 관훈동 헌 책방을 순례하고 돌아오면 이미 어둑해져 거리에 전기불이 환하게 밝혀졌지.

1941년 일제의 혹독한 식량정책으로 기숙사에서 나온 윤동주는 넉 달쯤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한다. 일제의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를 받고 있던 김송의 집에서 윤동주는 「무서운 시간」, 「태초의 아침」, 「십자가」, 「또 다른 고향」 같은 작품을 완성한다.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그동안 쓴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자필 시고집(稿) 세 부를 만든다. 그는 세 부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갖고, 다른 한 부는 연희전문의 영문과 교수인 이양하에게, 나머지는 후배 정병욱에게 준다.

「별 헤는 밤」을 완성한 다음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기념으로 출판을 계획했다.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한 다음 그 한 부를 내게다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처음에는(「서시」가 완성되기 전)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 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 송우혜, 『윤동주 평전』(세계사, 1998) 재인용

이 시고를 받아 읽은 이양하는 출판을 보류하길 권한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등 몇 편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며, 일본 유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에도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를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이양하의 권유를 받아들여 당시에는 출판하지 않지만, 졸업 직후 용정으로 돌아와서도 아버지와 출판 문제를 의논하는 등 시집 출판에 미련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돈 문제가 걸려서 출판 계획을 접게 된다. 결국 윤동주 생전에 시집 출판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뒤 윤동주와 이양하가 갖고 있던 시고는 행방을 알 길이 없게 된다. 나머지 정병욱에게 준 시고만 그의 어머니가 명주 보자기에 싸서 장롱 속 깊이 감춰둔 덕분에 해방 뒤인 1948년 1월 30일, 드디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빛을 보게 된다.

이윽고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그는 집에 전보를 치는 등 귀향 준비를 서두른다. 그러나 귀향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윤동주가 사상범으로 교토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된 것이다. 송몽규도 함께 잡혀 들어가는데, 이들의 죄명은 ‘사상불온·독립운동·비일본신민·서구사상 농후’ 등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1943년 한국 학생대표가 한국 독립의 의지를 밝히려고 중국의 장제스 총통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가던 도중에 일경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일제는 똑똑하다는 한국 학생들을 잡아들였는데, 그때 윤동주와 송몽규도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지나 윤동주는 2년 형, 송몽규는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용된다. 1945년 간도 명동촌의 집으로 윤동주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 통지서가 날아든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아버지 윤영석이 당숙 윤영춘과 함께 시신을 넘겨받으러 일본으로 떠난 며칠 뒤 다시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 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제국대학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내용의 때늦은 우편물이 도착한다.

그 얼마 전, 후쿠오카형무소에 들어간 윤영석은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 명이 주사를 맞으려고 시약실 앞에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윤영석은 그 속에서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발견한다.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그 모양으로…….”

일제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세균 실험을 했는데, 윤동주도 바로 그 실험에 이용되어 죽은 것이다. 말을 맺지 못하고 흐느끼던 송몽규도 그로부터 23일 뒤 윤동주의 뒤를 따른다. 방부 처리를 해놓아 윤동주의 시신은 말끔했다. 장례는 3월 어느 눈보라 치던 날에 치러지는데, 윤동주는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힌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산 시인 윤동주. 그의 시 세계를 지배하는 정서는 부끄러움과 죄의식이다. 자신을 둘러싼 식민지 피지배 현실이라는 테두리와 내면세계 사이에서 그는 심각한 자기혐오와 수치심에 빠져 괴로워한다. 그의 시에 중요한 심상으로 등장하는 ‘우물’과 ‘거울’은 바로 개체를 둘러싼 사회와 종족과 역사라는 큰 틀에 비추어 스스로 바라보는 자기 응시와 자기 성찰의 매개적 상징물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끊임없이 윤리적인 자기완성을 꿈꾸며 내부에 도사린 한 점의 욕됨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하던 청년 시인은 이렇게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처럼 떠나고 만다.

각주

[네이버 지식백과] 윤동주 [尹東柱]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간 청년 시인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나무이야기)